화성 호산나교회, 진심의 공동체사역 큰 모범
이성구 목사 “장교신앙으로 변화 일궈가겠다”

호산나교회 전경.
호산나교회 전경.

고령화와 주민 이탈이 심해지는 농촌 지역에서, 목회자와 교회는 무엇을 주력해야 할까.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에 위치한 호산나교회(이성구 목사)는 누구나 알지만, 누구나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기본기로 농촌교회의 본이 되고 있다.

1988년 한 여전도사에 의해 개척된 호산나교회는, 양노리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다. 버려진 공장건물 폐가에서 시작된 교회는, 교인들의 헌신으로 1990년 현재의 예배당을 세웠다. 호산나교회는 2003년 이성구 목사의 부임 이후 안정세에 접어들면서 아름다운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이성구 목사는 서울 출생에,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교원자격증까지 있던 터라, 많은 이들에게 도시목회가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조금도 그런 마음이 없었다. 도시든 농촌이든, 어디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면 간다는 생각이었다.

“존경하는 목사님께 ‘장교 신앙’이라는 개념을 배웠어요. 예수님이 사령관이시고, 목회자는 사령관이 지시하는 곳은 어디든 가야하는 장교라는 가르침이었죠.”

자연스레, 부목사로 사역하던 인천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화성시 농촌 지역으로 청빙을 받았을 때도 이 목사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성구 목사는 호산나교회 청빙을 받기 전 수요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설교 후에 직접 어르신들을 승합차에 태워 집으로 모셔다 드릴만큼, 농촌목회에 준비된 목회자였다.
이성구 목사는 호산나교회 청빙을 받기 전 수요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설교 후에 직접 어르신들을 승합차에 태워 집으로 모셔다 드릴만큼, 농촌목회에 준비된 목회자였다.

농촌교회가 어렵다는 것을 짐작은 했지만, 부임 당시 호산나교회는 말 그대로 어려웠다. 내부 갈등으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교인이라고는 노인들과 아기엄마 몇몇 등 10여 명에 불과했다. 재정은 적자였고, 당장 주보를 만들 프린터도 없었다.

하루하루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이 목사는 무엇보다 교인들을 가족이라 여겼다.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아기 엄마들은 동생이라는 마음으로 가정형편을 살피고 기도했다. 더 나아가 동네 모든 주민들도 가족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겼다. 동네 어르신들 집을 찾아가 전구를 갈아주고, 보일러를 고쳤다.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주민들의 경조사를 챙겼고, 성탄절 전야 때는 모든 집들을 찾아가 새벽찬양을 불렀다.

“근처에 장애인 복지시설이 있는데, 거기에서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칭찬을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어요. 가족 같은 정도가 아니라, 가족이고, 한 몸이라는 거죠. 그때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이 목사의 노력에 주민들도 하나둘 마음을 열었다. 이 목사에게 소금을 뿌려댔던 이웃들이 이제는 새로 이사 온 사람들에게 호산나교회를 소개해주는 사이가 됐다. 이 목사는 “진정으로 지역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고, 한 영혼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며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이 농촌목회의 장점”이라며 “내가 주민들을 가족으로 대할 때 그들도 나와 우리 교회를 가족으로 대하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고 말했다.

성탄전야제에서 성도들이 찬양하고 있다.
성탄전야제에서 성도들이 찬양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 목사는 ‘연결’을 호산나교회와 자신의 목회 특징으로 꼽았다. 말 그대로 호산나교회가 지역 내 다른 교회, 더 나아가 선교지와도 연결된다는 생각이다.

“제가 부임하기 전에 있었던 교인들이 다른 교회들에 나가는 것을 보니까, 질투가 나더라고요.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절에 다니냐? 내 교회에 다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하시더라고요.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이 목사와 함께 심방에 나선 교인들이 한 어르신을 위로하고 있다.
이 목사와 함께 심방에 나선 교인들이 한 어르신을 위로하고 있다.

그때부터 이 목사는 호산나교회에 다니든, 다른 교회에 다니든,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은 자녀임을 새롭게 인식했다. 시골 역시 개교회주의가 심한데, 그것 역시 깨기 시작했다. 이웃 교회에 부흥회가 열리면, 승합차에 교인들을 태우고 부흥회에 찾아갔고, 헌금도 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이웃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는, 그들도 호산나교회에서 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다.

작은 시골교회지만 선교에도 힘써,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10군데나 되는 선교지를 재정으로 후원하고 있다. 재정 후원을 못하는 곳은 기도로 꾸준히 협력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기독신문이나 각종 언론매체에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들이 보도될 때면 잊지 않고 주보에 기도제목을 올린다. 최근에는 화재로 중태에 빠진 강병구 목사 부부의 사연을 기독신문에서 읽고, 주보에 기도제목을 올렸다.

예배 장면.
예배 장면.

이 목사와 호산나교회가 힘쓴 ‘가족’과 ‘연결’은 고스란히 아름다운 열매로 맺히기도 했다. 5년 전 그동안 빌려 써오던 예배당 땅을 매입하거나, 예배당을 옮겨야 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동안 호산나교회로부터 ‘가족’으로 여겨졌고, 기도와 후원으로 ‘연결’된 많은 이들이 십시일반 재정을 후원해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 목사 자신이 1년간 생활비를 안 받겠다며 본을 보이긴 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지 못할 ‘기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장교 신앙’으로 살고 있다는 이 목사는 “농촌목회는 Y자 삼거리가 아니라, T자 삼거리 같다”고 말했다. 멀리서도 길이 보이는 Y자 삼거리와 달리, T자 삼거리는 멀리서 볼 때 길이 막힌 것 같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걸어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조금씩 길을 보여주신다”고 농촌목회를 꿈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권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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