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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의 삶

이성구 1 3,143 2008.03.01 09:43
"적신(赤身)으로 왔으니, 적신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하나님 부르실 때 홀가분하게 떠날 준비가 다 됐다.

이 땅에서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바쳤고다.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감사예배로 예배하거라…."

2008년 2월 21일 새벽 6시. 박명수(예장합동 전 총회장) 목사는 아흔 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딸들은 장농서랍

에서 유서를 찾아냈다. 유서는 두 장이었다. 한 장에는 고인이 섬긴 청량교회와 농어촌목회자 자녀들을 위해 설립한 목민

학사 앞으로 1억5000만원을 기증하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다른 한 장은 자녀들에게 주는 내용이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3남4녀는 유서를 들고 한동안 울었다. '우리 아버지 너무 멋지다. 진짜 멋쟁이를 아버지로 뒀다.'

박 목사는 89세때 유서를 써놨다. 생전에도 그는 '빈 손'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돈을 쓰지 않으려 했고 전등불 하나

켜는 것도 절약했다. 그러나 어려운 학생 등 인재양성을 위해서라면 크게 내놓았다.

경성신학교 재학당시 학생회장을 지낼 정도로 리더십이 있던 박 목사는 졸업후 인천 송현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송현교회에서 자리를 잡을 만할 때 박 목사는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목회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19년이 흘러 박 목사는 경북 의성으로 자리를 옮겼고 자리를 잡을만 하자 이번엔 서울 제기1동 청량교회(4대 담임목사)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가 택한 마지막 목회지인 청량교회는 성도수 60명의 작은 교회였다. 박 목사는 교회법상 정년제도가

없던 때 72세의 나이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에는 자녀들이 모아 준 칠순 기념 용돈과 아내를 보내고 남은 조의금을 보태 서울 창2동에 다세대주택 건물을 샀다.

그곳에 농어촌선교회의 이름으로 목민학사를 세웠다. 이 학사는 얼마 뒤 구청에 기증했다. 지금껏 어려운 가정의 농어촌

목회자 자녀 80여명이 목민학사를 거쳐갔다. 교회안에는 장학회가 꾸려졌다. 그는 6대 목사로 부임한 송준인 목사에게

장학금으로 1억원을 내놨다.

'바른신앙' '인재양성' '근검절약'의 세가지를 신념으로 살아온 박 목사는 자녀들을 모두 바르게 키웠다. 큰 아들 영신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씨는 녹색연합대표로 우리나라 사회학계에선 일가를 이뤘다.

부인 문은희(한국알트루사여성상담소장)씨는 고 문익환 목사의 여동생이다. 보수적인 합동 교단과 진보의 기장 교단이

함께 한 것이다. 차남 정신씨는 숭실대학교수로 한국학자이다. 막내딸 마리아씨는 우간다 선교사, 둘째 딸 에스더는 아름

다운동행 상임이사로 봉사하고 있다.

지난 23일 박 목사의 영결예배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으로 치러졌다. 고인은 95년 사후 장기기증에 서약했다.

해부학 실습용으로 90대 노인의 시신은 병원에 기증됐다. 적신으로 왔으니, 적신으로 가는 것이다….
(국민일보 기사 펌)

Comments

이성구 2008.03.01 09:43
  저도 대학 시절 한학기 목민학사 신세를 진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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